요즘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라는 책이 인기입니다. 통역대학원을 졸업한 MBC PD 김민식 님이 쓴 책이죠. 그 책에서 소개한 다른 출판사의 영어회화 책까지 덩달아 인기더군요. 출판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 솔직히 부럽습니다. 몇 십 만권은 고사하고 1만권 판매하기도 매우 힘든 게 현실이니까요. 열심히 검색을 해 가며 ‘내 책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고민해 보기도 합니다.
김민식 님은 제게는 대학원 몇 기수 선배님인데,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합니다만 대학원 다닐 때 그분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은 있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드라마 PD가 된 분이 있다는 얘기와, 그 분이 원래 끼가 많고 대학원 재학 시에도 좋은 의미로 ‘튀는’ 분이었다는 교수님의 말씀도 들은 기억이 있네요. 사실 저도 MBC PD를 지원했다가 나름 안타깝게 고배를 마신 적이 있어서 부럽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인 부러움을 말씀드리려는 것은 아니고요, 영어 공부 방법으로서 책 한 권을 외우는 방법, 즉 ‘통암기’에 대해 얘기하려고 글을 적습니다.
혹 오해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면, 저는 타인의 성공, 특히 시장에서의 성공을 부정적으로 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시장에서의 성공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고 믿고, 저도 시장에서의 성공을 추구합니다. “책 한 권을 외우라”는 메시지도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샀기 때문에 베스트셀러를 만들었겠죠. 하지만 ‘통암기’를 너무 맹신하지는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장 유념할 점은, 통암기는 영어를 잘하기 위해 필요한 방법의 ‘하나’일 수는 있어도 전부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책 한 권을 외워 보는 것은 좋습니다. 그럼 책 한 권을 외운 다음에는 무엇을 할까요? 책 두 권, 세 권, 네 권을 외워야 할까요?
국내파가 영어 능력을 향상시켜가는 과정에는 분명 단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단계마다 새로운 장애물을 넘어야 합니다. 책 한 권을 외워서 영어 문장을 만드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면 그 다음에는 듣기가 막힐 수도 있습니다. 듣기가 어느 정도 되고 나면 내가 쓰는 글이 너무 유치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유치함을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표현을 외우고 나면 공부한 건 많은데 실제 원어민과 의사소통하는 능력은 뒤처져 있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책 한 권을 외운 다음에도 ‘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은 계속될 것입니다. 결국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나는 어느 정도의 영어 능력을 필요로 하는가’라는 개인적이고 근본적인 요구에 맞춰 영어 공부를 해 나갈 수밖에 없겠죠.
저도 통암기를 시도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인기가 예전만 못한 잡지입니다만 ‘리더스 다이제스트’ 한 권을 다 외워 보겠다는 야심찬 시도를 해 본 적도 있고, 누군가의 조언에 따라 코리아 헤럴드 사설을 매일 1개씩 외워 보려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작심삼일로 그만두었습니다. 재미없고 고통스럽고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해봤니?’라는 스타일로 영어책을 쓴다면 저는 ‘매일 10시간씩 영어 방송 본 적 있니?”라고 제목을 붙이겠습니다. 통암기보다 더 무식한 방법을 얘기한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저는 국내파에게는 듣기가 제일 중요하다고 굳게 믿습니다. 영어의 궁극적인 효용이 결국 정보 습득과 의사소통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잘 듣는 사람이 항상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될 것임은 자명합니다.
듣기 중에서도 특히 ‘눈치로 알아듣는 능력’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영어를 공부하면 영어 능력이 무한정 발전할 것 같지만, 언어 생활을 100% 영어로만 하지 않는 한 한계에 봉착합니다. 모든 상황에 준비되어 있을 수는 없으니,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능력은 결국 ‘눈치’와 ‘융통성’에서 나옵니다.
지금은 Jimmy Fallon이 진행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한창 영어 공부를 할 때 NBC의 토크쇼 Tonight Show의 진행자는 Jay Leno였습니다. 쇼를 시작하면 우선 10분 정도 무대에서 혼자 얘기하는 monologue를 했는데, 저는 그 내용이 정말 알아듣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영어학도의 입장에서 Jay Leno의 발음은 알아듣기 어려울 뿐 아니라, 현재의 미국 사회를 풍자하는 농담들이 거의 전부라 내용을 이해하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매일 그 monologue를 녹화해서 반복해 보기를 몇 달 동안 하니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Jay Leno 특유의 억양과 말버릇도 알게 되고, 그가 하는 농담에도 유사성이 있음을 눈치채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제가 했던 것이 ‘눈치로 듣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예를 들어 수능 영어 시험 문제의 60-70% 이상을 맞히는 사람이라면, 영어라는 언어의 기본은 거의 알고 있다고 봐도 좋습니다. 그런 분들은 스스로 꾸준히 듣는 것만으로 영어 능력을 계속 향상시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뉴스, 다큐, 토크쇼, 영화, 미드, 무엇이든 듣고 싶은 것을 정해 열심히 들어 보세요. 영어 능력이 발전하는 것을 느끼면서 제가 말씀드리는 ‘눈치로 듣기’의 의미도 이해하실 것입니다. 얼마 전 팟캐스트에서 코리아 헤럴드 양승진 기자님이 ‘맹목적인 듣기를 하지 말라’라고 하셨는데, 정말로 맹목적인 듣기는 효과가 없지만, 처음에는 모르는 것 같아도 꾹 참고 계속 들으면 스스로 조금씩 의미가 이해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양 기자님도 동의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베스트셀러 얘기를 좀 한다면, 저는 그렇게 많이 팔리는 책을 결코 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김민식 PD님만큼 재미있게 뭔가를 풀어내는 재주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제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 중에는 오히려 프랙티쿠스의 ‘건조함’을 좋게 평가해 주시는 독자와 청취자가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께 감사드리며, 오늘도 저희 스타일대로 책을 만들고자 합니다. 영어로 된 뭔가를 열심히 듣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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