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에 넣기 위해 우리말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면서
우리말을 영어로 바꿀 때, 우리말 원문에 끌려가지 않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사실 영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게 되면, 우리말을 생각하고 그 말을 머릿속에서 영어로 옮기지는 않죠.
그보다는 나도 모르게 입에서 영어가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How old are you?와 같은 간단한 문장을 ‘몇살이세요’라는 우리말을 생각한 후에 영어로 말하지는 않죠. 나이를 묻고 싶으면 그냥 How old are you?라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게 되는 거죠.
외국어든 모국어든 우리가 ‘말’을 하게 되는 과정을 조금 꼼꼼히 분석해 보면
우선 ‘하고 싶은 말의 내용’이 머릿속에 떠오르게 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나고 머릿속이 조금 간질간질해진 후에 그 말이 입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모국어의 경우 그 모든 과정이 순식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의식을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외국어의 경우는 다르죠. 말하고 싶은 내용이 떠오르면 머리가 간질간질해지고, 최종적으로 외국어 표현으로 입밖에 나옵니다. 그 속도는 우리말을 구사할 때보다 대개 느리죠. 정확한 외국어 표현이 생각나지 않으면 답답하고 더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동시통역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하는 이론서를 대학원 때 읽은 적이 있었는데요, 내 머릿속에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는 과정을 상대방이 하는 말을 이해하는 것으로 ‘대체(replace)’한 후에, 최종적으로 입에서는 외국어가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내 머리를 비워 두고 그 자리를 연사가 말하는 내용으로 채운 후 그 내용을 영어로 바꿔 말하는 것이죠. 솔직히 알 듯 말 듯한 얘기입니다. 언어학 전공자들이 고민할 문제겠죠.
하지만 ‘상대방이 하는 말을 이해한다’라는 부분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표현을 기억한다’가 아니고 ‘내용을 이해한다’입니다.
통번역을 처음 공부하는 학생에게 우리말을 영어로 옮겨 보라고 하면, 십중팔구 우리말 ‘표현’에 끌려가서 이상한 영어 문장을 만들고 맙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표현'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전달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이해한 내용을 가장 자연스러운 자기 영어로 새로 작성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정확하죠. 결국 얼마나 믿을 만한 자기영어가 있느냐가 핵심이 되겠네요.
통번역을 직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회사에서 영어를 쓰면서 일하다 보면, 누군가가 생각해 놓은 것을 영어로 표현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이 때에도 자신이 아는 가장 자연스러운 영어로 자신이 이해한 것을 표현하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원문에 끌려가지 않고 표현하는 자유는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것이죠. 번역이라면 그 자유가 많이 제한될 테고, 통역은 조금 더 자유가 주어질 것이지만, 그냥 영어로 전달만 하면 되는 상황이라면 훨씬 많은 자유를 누려도 되겠죠.
우리말 원문에 휘둘리지 말고 핵심적인 내용을 잘 전달하는 영어를 목표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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