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
(지옥으로 가는 길이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도서 정가제에 대한 제 생각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위와 같습니다.
의도야 좋죠. 하지만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를 우리는 현실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저희 프랙티쿠스도 출판사이고, 책을 팔아서 이익을 취하는 회사입니다.
당연히 출판산업이 융성하기를 바라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적어도 종이 출판 사업은 내리막입니다.
출판사업이 예전 같지 않은 데에는 매우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많은 정보를 인터넷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이죠.
고전적인 방식으로 정보를 제공하던 책들은 판매량이 줄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출판 사업은 진입 장벽도 낮죠. 자영업자 수가 너무 많다는 우려는 출판계에도 적용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누군가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냉정한 현실이죠.
종이책 판매의 감소, 전자책의 등장으로 인한 도서 포맷의 변화, 정보 습득 채널의 다양화, 블로그 등을 통한 저자군의 확대 등은 모두 출판계가 겪는 구조적인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는 고통스러운 변화일테고, 누군가에게는 기회겠죠. 세상 모든 산업이 그렇게 변화하는 것이 아닌가요?
동네 서점이 줄어드는 것도 그런 구조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모든 유통 채널이 변화를 겪는데, 도서 판매는 왜 예외가 되어야 하나요?
제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많을 테니, 논쟁의 여지가 많은 구조적인 문제들은 차치하고 도서 정가제 시행과 관련한 현실적인 문제만 지적하고자 합니다.
저는 도서정가제가 대형 출판사와 대형 서점에게 유리한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시장에서 신생 기업이 자신을 알리기 위해 할인보다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콘텐츠에 자신이 있다면 시리즈 책을 만들고 그 중 한 권을 반값 혹은 그 이하로 팔 수도 있겠죠. 값싸게 내용을 접한 독자가 만족한다면 그 출판사의 책을 추가로 구매할 것입니다. 도서 정가제 하에서는 이런 마케팅 방법이 불가능합니다.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유명 출판사는 어떤 책을 내놓아도 무명 출판사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판매하게 됩니다. 이름값 때문에 그렇지요. 그러면 그런 유명 출판사들은 이름에 걸맞게 출판 산업의 다양성에 기여하고 있습니까? 영어책을 내는 대규모 출판사들의 도서 목록에서 만족스러운 책을 찾으셨나요? 도서정가제를 통해 중소 출판사를 보호하고 출판계의 다양성을 장려하겠다고 하는데, 중소 출판사들로부터 스스로를 알리는 계기를 박탈하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유명 출판사와 무명 출판사의 책이 동일한 할인률로 시장에 나갔다고 합시다. 독자는 어떤 책을 우선 선택하려 할까요?
서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터넷 서점은 정가의 60%를 주고 출판사에서 책을 가져갑니다. 지금처럼 20% 할인이 가능하다면 20%가 자신들의 매출이 되겠죠. 그런데 앞으로 10%의 할인만 가능하다면, 30%가 자신들의 매출이 됩니다. 매출이 는다는 얘기죠. 바로 그런 이유로 최근 한 인터넷 서점의 주가가 많이(!) 올랐습니다.
저는 다양한 유통 채널에 따라 차등적인 가격이 부과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으로 책을 사는 사람은 책을 직접 보지 않고 사는 일종의 리스크를 감당하는 대신, 할인이라는 혜택을 얻습니다. 인터넷으로 옷이나 전자 제품을 사는 사람과 마찬가지로요. 오프라인 서점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한 사람은 1000원 ~ 2000원 정도 더 돈을 내더라도 바로 원하는 책을 읽는 혜택을 선택합니다. 그렇다면 두 소비자 모두 낼 돈을 내고 받을 것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요?
시장은 깔끔해 보이지 않지만 그 나름의 역동성과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서는 보통 상품과 다르다'라는 주장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는 분께는 제가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독자시라면 도서정가제로 인해 매우 아이러니컬한 정반대의 결과가 생길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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